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무야 3 137 2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1)


안녕하세요~ 얼마 전 좋은 계기로 레팅을 알게 되어 시작한지 2주정도 되어갑니다.

그동안 소소한 챌린지를 통하여 많은 분들과 소통하며, 저의 일상들을 공유하다가 문득 블로그에 저의 인생사를 남겨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몇 글자 적어봅니다.

제목과 같이 저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 사람입니다. 불과 11년 전만 해도 그러진 않았는데요. 저는 탈북민입니다.

어찌 보면 가깝고 어찌 보면 너무나도 먼 그곳에서 온 저는 항상 “탈북민”이라는 말을 하기도, 듣기도 꺼려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요, 학교 친구들에게 저는 때론 비난의 대상이었고 흘김에 대상이었어요.

그런 시선들 속에서 따뜻함을 찾기엔 저는 너무 어렸고, 그들 개개인의 마음을 알기엔 저는 이방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은 서로의 다름을 알고 학창 시절 우리는 모두 어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두가 모두를 사랑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북한 양강도 어는 작은 군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나 14살까지 살다 탈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친부는 중매로 만나 3번의 만남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제가 태어나 기전 친가는 운전수인 할아버지로 인해 동네에서 부러워하는 부자였고, 외가는 무용수였던 외할아버지로 부족함 없는 집안 이였지요. 그러나 친할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가세는 기울고, 절약을 모르던 친가는 한순간 빚더미에 올랐고, 그로 인한 집안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어요.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한 북한에서 자란 친부는 언제나 어머니와 저를 참 많이 때렸어요. 밥 먹다 기침해도 때리고, 신발이 삐뚤어져 있어도 때리고 심지어 남동생이 싸움질 하고 와도 저와 어머니를 때렸어요. 이유는 동생을 돌보지 못한 죄라고요. 친부가 낮잠을 잘 때 모두 숨 죽이고 말도 못했으며, 천식이 심했던 동생은 기침도 못할 정도니까요. 

그렇게 7살이 되던 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기억하는 죽음 중 제일 처음이었어요.

그땐 어려서 슬픔을 몰라 울지 못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그날을 추억하면 먹먹한 심정이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부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는 나이든 노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친부는 매일을 술과 도박으로 집에도 잘 안 들어왔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은 어쩌다 들어온 아빠의 행패가 더 싫었어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왜 신고하지 않나, 왜 이혼하지 않나 많이들 궁금하겠죠?

왜 신고를 안했겠어요..

한 겨울 날 입술에 묻은 피 닦지도 못한 채 5살 동생의 손을 잡고 맨발로 두드린 집 대문이 몇 개였던지. 우리 엄마 구해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을 때 우리 손을 뿌리친 경찰 아저씨 얼굴은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삶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고, 지극히 가정사였기 때문이죠. 그게 경찰이라도

왜 이혼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그땐 참 엄마를 원망 많이 했었죠.

근데 이혼을 하면 자식들 앞날이 막혀서 못한 거였어요. 결혼이 막히고 출세가 막히고, 

아직도 북한은 족보사회라 간부가 되려고 해도 8촌의 사돈까지 따지는 것이 그들의 엄격한 룰이거든요.

그런 사회의 약자는 참아야 했으며, 끝까지 참아야 했던 거예요.


생각이 좀 트였던 사람들은 장사를 하거나 밀수를 하거나 개인의 기량의 따라 살길을 찾기 바빴는데, 사촌 언니도 밀수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엔 소소한 것부터 시작하다 나중에는 중국에 넘어가 한족과 결혼하여 임신까지 하게 되었어요. 막달이 다가올 때쯤 언니는 북에 있는 엄마에게 돈을 좀 주려고 북한에 왔다가 잡힙니다. 



혜산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 된 언니는 중국인의 씨앗을 품었다며 강제 낙태를 시행케 합니다. 아이가 없으면 무기징역 인 것을 안 언니는 4층이었던 병실에서 뛰어내리게 됩니다.

그때 하반신 마비가 오면서 교관들은 송장 치르긴 싫으니 친척 중 가장 가깝던 저희 집으로 언니를 보내더라고요.

그렇게 엄마는 언니를 7개월 넘게 오줌 똥 다 받아가면서, 걸음마 연습부터 죽은 아기의 시신까지도 묻어주었죠. 그렇게 언니는 저희가 사는 환경과, 삼촌의 난폭함과 무능함까지 보게 되었어요. 그때 언니가 엄마랑 약속을 하더라고요. “숙모 내 꼭 남조선으로 보내 주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회복한 언니는 다시 중국으로 넘어 갔어요.

그 후 몇 개월이 지나 언니에게 기별이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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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무야 2021.12.05 18:44  
모든 내용은 실화이며, 어떠한 정치적 발언은 없으며 문제시 삭제합니다. 관리자님은 문제시 삭제하지 마시고 미리 말씀해주세요.
악플은 아픕니다~
지여쓰 2021.12.11 12:21  
잘 읽고 갑니다 :) 화이팅입니다!
무야 2021.12.11 16:44  
감사합니다 2편도 다음주 중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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