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굴리트",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던 이유

"적폐 굴리트",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던 이유

축잘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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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베로 굴리트



선수시절


스텝: 감독님... 반바스텐이 부상이랍니다 ;;

감독: 야! 굴리트 올려

스텝: 감독님... 프랑코 바레시선수가 부상이랍니다 ;;

감독: 야! 굴리트 내려

스텝:감독님... 레이카르트 선수가 부상이랍니다;; 굴리트 넣을게요

감독: ㅇㅇ 



이 유머글은 실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반 바스텐이 부상으로 시즌 상당수를 결장햇던  87/88 시즌에는 또 다른 공격수인 비르디스와 함께 투톱을 이루기는 했으나 그 이후 사키 감독의 체제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계속 공격수로 뛰었다. 


굴리트는 밀란에서는 공격수를 주 포지션으로 삼았기에 그가 가진 멀티 플레이 능력은 생각만큼 많이 발휘하지는 못 했다. 프랑코 바레시를 비롯한 밀란의 센터백들이 결장할 때는 굴리트가 아닌 레이카르트나 그 말디니가 그 자리를 채웠고, 레이카르트가 미드필더로 나서지 못 할 때는 굴리트가 그 자리를 메꾸기도 했으나 우선적으로는 안첼로티와 도니도니의 조합이 고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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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키 밀란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굴리트가 처음부터 공격수였던 것은 아니였다. 밀란으로 이적하기 직전까지 굴리트는 당시에는 '10번'으로 일컬어지던 공격형 미드필더였고 그보다 이전에는, 프로 데뷔를 리베로로 시작해 80년대 중반에는 떠오르는 리베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84~86년 사이 미디어의 월드 베스트 선정 자료속에서는 리베로로 분류되던 굴리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바레시보다도 더 유명한 리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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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라인에서의 패싱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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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셉트 후 오버래핑하는 리베로 굴리트




 

당시의 다른 네덜란드 리베로(쿠만과 레이카르트 등)들이 그랬던 것처럼 굴리트는 리베로로 나썻으나 (가장) 프리롤하게 뛰며 수비에서 공격을 오고 갔다. 그래서 폐예노르트와 PSV에서 뛸 당시 굴리트의 선발 라인업에서 포지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필요에 따라서는 공미로 출전해도 리베로로 뛰거나 공격수로 뛰는 것이 굴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베로 굴리트의 출현을 이 때와 말년의 첼시에서를 제외하고는 보기 어려웠다. 조직력을 중시하던 밀란의 사키 감독은 엄격한 규율이 있는 4-4-2를 구성하기 위해 굴리트를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게 했고, 후임인 카펠로는 윙으로 뛰게 하여 밸런스를 위해 뛰게 했다.

그리고 삼프도리아의 에릭손 감독은 굴리트를 주로 센터 포워드로 기용했다.


즉, 흔히 굴리트의 소속팀 내 누군가가 빠지면 그 자리에 굴리트가 들어간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굴리트는 리베로 혹은 플레이메이커로 뛰거나 고정적인 한 자리를 전문적으로 맡았기 때문에 다른 멀티 플레이어가 대체로 들어가는게 일반적이었다. 또한, 박투박으로 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야야 투레와 같은 포지션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틀리다.

(밀란 경기 중 4-4-2 중원에 나온다면 그 포지션은 엄밀히 말해 박투박이 아니라 트레콰르티스타다. 사카는 플랫한 4-4-2 외에 넓은 다이아몬드 형태의 4-4-2도 혼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 트레콰르티스타의 주전은 도니도니다.)



요약

1. 굴리트는 리베로로 데뷔

2. 네덜란드 리그에서는 주로 리베로였지만 프리롤, 그 외 공미와 공격수로 뛰었으나 프리롤

3.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포지션이 세컨드 스트라이커 -> 오른쪽 윙 -> 센터포워드로 고정적

4. 굴리트는 생각만큼 아무곳이나 땜방으로 들어가는 선수는 아니었다. (땜방 자원들은 따로있었음)

5. 박투박이 아니니깐 야야 투레와 같은 포지션으로 취급은 틀린 이야기다.





2. 마라도나의 라이벌 굴리트




​흔히 마라도나의 자서전에서 마라도나 본인이 꼽은 최대의 라이벌로 마테우스가 언급되기에, 마라도나의 라이벌하면 마테우스를 연상시키지만 당대 이탈리아 무대에서 가장 라이벌리를 이루던 선수는 굴리트였고 마테우스는 위상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아마 마라도나는 마테우스를 월드컵 결승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기에 자신의 최대 라이벌로 꼽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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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시즌 전 세리에A 최고의 선수 예상 투표>


86년 월드컵이 끝나고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마라도나. 86/87 시즌에 이탈리아 세리에A도 집어 삼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더욱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87/88 시즌 여름, 한 사내가 마라도나가 나폴리로 이적할 때 세운 이적료 기록(5M 파운드)을 갈아 치우며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루드 굴리트'. 이 시기 마라도나에 가장 가까운 선수였다. 그렇기에 이 네덜란드 인은 시즌 전, 이탈리아 언론에서 투표한 (국뽕 섞인)

세리에A 최고의 선수 예상에서 마라도나 다음의 2위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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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8 시즌 전반기 평점, 굴리트 VS 마라도나>

*노란색 리그 1위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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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가제타, 레전드 산드로 마쫄라의 굴리트 VS 마라도나 
 

그리고 예상대로.. 아니 예상은 빗나갔다. 굴리트가 적응기간 없는 무서운 폼을 보여주며 마라도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1위로 달리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당시 레전드 산드로 마쫄라는 가제타에 굴리트와 마라도나를 점수에서는 굴리트의 우세를 볼 수 있다.


최대 폼에서 굴리트는 112점, 마라도나는 114점이었지만 현재 폼 점수에서 굴리트가 107점으로 마라도나보다 5.5점 더 높았다.





굴리트와 마라도나의 맞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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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트 8.5점 VS 마라도나 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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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트 VS 나폴리 활약상. 굴리트 1골 1어시>



리그 13라운드. 굴리트와 마라도나가 세리에A 무대에서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친다. 결과는 굴리트의 완승. 

굴리트는 1골 1어시를 기록했으며 나폴리를 완전히 부숴버렸고 마라도나도 1어시스트를 응수했지만 전반적으로 경기력이 좋지 못 해 팀의 4대1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리그 순위에서는 나폴리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 둘의 승부는 두 번째 맞대결인 리그 28라운드에서 갈리게 된다. 나폴리의 홈에서 펼쳐진 경기. 나폴리가 여전히 1위였지만, 턱 밑까지 쫒아온 굴리트의 밀란에게 진다면 리그 1위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과는 밀란의 3대2 승. 마라도나는 프리킥으로 1골을 넣었지만 굴리트는 2어시를 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마라도나 6.5점, 굴리트 7.5점)




그렇기에 마라도나는 득점왕을 차지했고 구에린도르 종합 평점도 6.66점으로 굴리트(6.61)보다 앞섰지만, 두 번의 맞대결에서 모두 패했고 리그 우승까지 내주었기에 진정한 승자는 굴리트로 여겨졌다.


*87/88 굴리트 29경기 9골 9어시, 리그 우승

*87/88 마라도나 28굥기 15골 9어시, 리그 득점왕


요약


1. 마라도나 본인의 최대 라이벌은 마테우스 (자서전 내용)

2. 실제 언론에서 조명하던 라이벌은 굴리트

3. 87/88 시즌 굴리트는 마라도나를 두 번 모두 이겼고 리그 우승도 빼았으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유러피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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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타의 88/89 시즌 굴리트의 부상과 평점에 대한 기사>


굴리트는 87/88 시즌 밀란의 리그 우승을 이끈 세리에A 최고의 선수였으나 유로88에서는 그리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대회의 주인공은 팀 동료인 마르코 반 바스텐이었고, 그는 유로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굴리트는 유로에서 반 바스텐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과 88/89 전반기의 부상으로 인해 발롱도르 2위에 그치고 만다.




88/89 전반기부터 나타난 굴리트의 무릎 부상은 반월판 부상으로 이어지며 89/90 시즌을 거의 통째로 날려버리게 만든다. 굴리트의 빈 자리는 마싸로가 채웠고, 굴리트가 없는 밀란은 반 바스텐이 이끌었다. 굴리트가 반월판 부상에서 복귀하게 된 것은 90년 4월 말로 장장 1년만의 복귀였다. 복귀 후 리그와 유로피어컨(현 챔스)을 소화하며 90월드컵을 위해 폼을 끌어올리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

90월드컵에서의 네덜란드는 팀 내 불화로 엉망이었고 핵심인 반 바스텐 그리고 굴리트의 폼도 최악이였다. 굴리트는 아일랜드 전에서 골을 넣으며 그나마 체면치레를 하기는 했다만 네덜란드는 16강 전 서독과 경기에서 패배로 12년만에 참가한 월드컵에서 이른 탈락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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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1 시즌 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 예상, 굴리트 2위>


굴리트는 카펠로 감독의 아래에서 4-4-2의 오른쪽 윙으로 뛰었지만 예전만큼 특별함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마치 회광반조처럼 다시 불타올랐던 것은 93/94 시즌 삼프도리아에서 뛸 때다. 밀란과의 계약 종료로 FA 신분이 된 굴리트는 에릭손 감독의 삼프도리아로 이적해 로베르토 만치니와 손발을 맞추게 된다. 포지션은 주로 센터 포워드, 31경기 15골 12 어시스트 이후 밀란으로 리턴하지만 다시 삼프도리아로 재이적을 하게 된다.


삼프도리아에서 한 시즌 이후에는 첼시로 이적해 감독 겸 선수(리베로)로 세 시즌을 뛴 후 선수 생활의 막을 내린다.
 



요약


1. 굴리트는 엄청난 피지컬과 거시서 나오는 전진성이 장점

2. 멀리플레이어지만 희생적인 스타일은 아니다(프리롤이다.")

3. 제한적인 테크닉으로 인해 활약이 제한적이었다. (도메스틱에서 매우 강하고 인터네셔널에서는 그만큼 강하지 않았다.)

4. 타고난 리더이며 슈퍼스타다.





*이 글은 https://www.fmkorea.com/2945080171 와 https://www.fmkorea.com/3333200900 등을 재정리하여 씀 



출처:'펨코 파스타칼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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