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2)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2)
재활치료를 마친 언니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우리 가족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새벽 같이 일어나 밭을 매고 나무를 하고, 물을 길는 아낙들의 일상이었죠.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때쯤 언니가 드디어 연락을 해옵니다.
한국에 갈 브로커를 찾았다는 거였어요. 아마 그때쯤부터 친부가 안보였어요.
엄마는 일이 있어서 멀리 사는 친척 집에 갔다고만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그해 농사는 저와 엄마, 할머니가 전부 감당해야 했어요. 14살 나이에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자전거로 하루에 두 세번씩 40키로가 넘는 옥수수를 싣고 30리 길을 달려야 했죠. 할머니는 막을 짓고 동생과 옥수수를 말리면 저와 엄마는 그것을 집까지 날라야 했어요.
그러다 자전거가 펑크라도 나면 끌고 집까지 올 수 밖에 없었어요. 북한은 한국처럼 자동차나, 농쟁기가 발전하지 못했어요. 주 교통수단은 자전가와 소 달구지가 전부랍니다.
그렇게 10월이 시작되고 얼추 가을 걷이가 끝났을 무렵 엄마는 저와 동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왔어요. 할머니 가방에 한국으로 갈테니 걱정말라는 쪽지와 함께.
(할머니는 늙어서 나고 자란 조국을 떠나기 싫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저희는 2010년 10월 14일 친척, 이웃, 친구들에게 조차 잘 있으란 말 한마디도 못하고 도망치듯 야밤에 압록강을 건너야 했어요.
어린 마음에 조금은 들뜬 듯 상기되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멀리 올 줄은 몰랐거든요.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온 저희는 어느 주택에서 기다리는 언니를 만나 차를 타고 언니 집으로 이동을 했어요.
그런데 어이 없게도 거기엔 몇 개월 전에 사라졌던 친부가 있더라고요. 기름진 얼굴에 살쪄서 불룩 나온 배를 한 친부가요.
얼마나 배신감이 드는지
언니는 전에 함께 살던 중국인한테서 쫓겨났다고 했어요. 아기를 못 지킨 언니는 그들에겐 싼 값에 팔려 온 북한 여자의 불과하다고.
그러다 한족인 형부를 만나 살게 되었고, 그 형부가 도와줘서 저희를 데리고 오게 되었다고 했어요. 제 기억엔 형부가 언니를 많이 아꼈던 거로 기억해요. 저희에게도 살뜰히 잘 대해줬고요.
언니 집에 간지 3일 만에 저희는 탈북의 길에 올랐어요. 중국에서 중국 국경까지 2주, 국경에서 라오스까지 1주일, 라오스에서 태국까지 3일, 태국 대사관에서 한국대사관까지 2주, 한국대사관에서 한국 국정원까지 약 1달.
고향을 나오고 3개월이 흘러 12월 14일 저희는 인천 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글 몇 자로는 적기 쉬워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험이 얼마나 많았더지요.
“잡히면 총살이다” “잡히면 북송이다” “울음 소리도 내면 안돼”
불안함과 어둠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두려움, 알 수 없는 여러 위험들
사람만 무서운게 아니라 라오스와 태국에선 많은 질병을 앓았어요. 눈병이나 위염, 원인도 모르는 열병.
그렇게 한국 국정까지 오니 저희는 천운이더라구요. 많은 사람들이 탈북의 길에서 가족이나 일행을 잃었고, 잡혀가는 모습을 봐야 했으니까요.
저희는 그래도 네식구 무사히 왔거든요.
사촌언니는 저희 보내고 따라온다고 했는데 중국 공안한테 잡혀서 북송 당한 걸로 전해들었어요. 아직까지도 마음이 안좋아요. 제가 여기 있는 것은 다 언니덕분이거든요.
저희는 국정원과 하나원을 통해 모든 절차를 걸쳐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받고, 경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 만난 한국은 얼마나 신기한 세상인지.
분명 한국말인데 이해 할 수도 없었고, 내가 배운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어서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전기와 쉼 없이 흐르는 수돗물, 배고픔 없는 이곳은 천국이었습니다.
노력의 대한 정당한 댓가, 공평한 법, 아프면 갈 수 있는 병원 이 모든게 완벽했어요.
저희 가정만 빼고요. 3살 버릇 80까지 간다고 친부는 한국에 와서도 저희를 아프게 했죠
기차역, 도로 식당 장소 불문하고 그의 폭력은 그칠 줄을 몰랐어요.
북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한국에서 그러면 안되는거 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그 때 이혼을 결심하고 오랜 접전 끝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엄마는 양육권을 가져오는 대신 모든 재산과 어떠한 양육비 지원, 생활비 지원을 포기한채 말이죠.
정말로 이혼 후 친부에게서 단돈 천원도 받은 적이 없어요.
그 시절 참 많이 힘들었죠. 낯선 이땅에서 어느 연줄 하나 없는 여자가 아이 둘은 키운단 것이 쉽지 않았음을 다들 아시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쉼터에 저랑 동생은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걸 보고 친부는 엄마 욕을 하더라구요. 한국까지 데리고 왔는데 은혜도 모르는 x 애들 앞길 망치는 x 그 모습을 보자니 참 못났더라고요.
그렇게 저희의 연은 끝났어요. 연락오는게 싫어서 폰번호는 다 바꾸고 소식조차 단절한지 어느덧 8년이 넘네요.
그런 시간이 있어서 요즘의 행복이 더 값지게 느껴지나봐요.
엄마는 2년전 쯤 재혼을 하셔서 깨볶고 있고, 저도 올해 여름에 결혼하여 곧 태어날 애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비록 지금은 힘들지라도 미래는 아직 안왔잖아요.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이길 수는 없을거에요.